◐빌리홀리/Billy Holiday-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 Billy Holiday의 I'm A Fool To Want You 와 그녀의 인생 이야기◑
코튼 클럽 Cotton Club>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흥청거리는 백인 엘리트와 그 발에 밟히는 흑인의 생활이 극심했던
미국의 1930년대를 흔히 코튼클럽 시대’라고 합니다.
코튼클럽이란 백인 귀족들만 출입할 수 있었던 극장식 고급 술집으로,
흑인은 그런 곳에 갈 여유도 없었겠지만 입장 자체가허용되지 않았고, 흑인 종업원은주방과 연결된 뒷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코튼클럽의 손님은 모두 백인, 연주자는 대부분 흑인이었죠.
Billy Holiday는 명성을 얻은 뒤 '코튼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는데,흑인이라는 이유로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했죠.
그 즈음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Cafe Society Club 라는 고급 술집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카페는 인종차별을않는 유일한 클럽이었습니다. 빌리는 그곳에 초빙 되었고, 고통받는 흑인의 노래를 들어주는 ‘고마운 청중’들을 만나 마음껏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Strange Fruit>는 바로 이 카페에서 일하던 시절에 부른 노래입니다.
이 비참한 노래는 예상을 깨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죠.
이름난 재즈 뮤지션 가운데 인생을 편하게 살다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현대 재즈를 빛낸 대스타의 대부분이 가난, 마약문제 따위로 굴곡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한 순간 편한 날 없이 유난히 참담한 삶을 살다간 여성 재즈싱어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사라 본,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3대 여성 재즈 보컬로 불리우는 Billy Holiday입니다.
1915년 볼티모어에서 태어난 빌리는 젖먹이 때 부모가 이혼해 친척집에서 학대받으며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우연히 사창가를 지나다가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를 듣고
반한 빌리는 재즈가 흘러 나오는 곳을 찾아가 스피커 앞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재즈를 듣고 따라부르는 것이 소녀의 유일한 낙이었죠.식모살이의 설움을 재즈로 달래던 소녀는
열 살 때 백인주인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소녀에게 엉뚱한 죄를 뒤집어 씌워 교도소에 보냈습니다.
2년 뒤 출소해 또 다시 강간당한 소녀는 엄마를 따라 뉴욕으로 건너가
할렘의 사창가 에서 창녀가 되었습니다.
창녀가 되어 일주일에 15달러를 벌면서 처음으로 분에 넘치는 ‘사치’를 즐겼던 빌리는 미국 대공항 때
우연히 할렘가의 한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 테스트를 받게 됩니다.피아노 반주에 맞춰 빌리의 노래가 울려 퍼지자 순간 홀 안이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모두들 숨죽여 소녀의 노래를 듣고 있었습니다.
빌리는 그 순간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그때 누가 핀이라도 하나 떨어뜨렸다면 그것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 같았을 것이다.”
빌리가 데뷔한 '코튼클럽' 시절, 클럽의 흑인 여가수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면
객석을 돌며 젖가슴이 보이도록 허리를굽혀 탁자위에 놓인 팁을 집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리는 손님이 집어주지 않는 한 탁자의 돈을 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동료들이 “자기가 무슨 Lady(귀부인)나된 줄 아는 모양이지”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때부터 빌리는 ‘Lady’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재즈 스타와 흑인 사이>
1936년 빌리는 드디어 독집 음반 <빌리 홀리데이 스토리-컬럼비아/CBS>를 내고,
이듬해에는 뉴욕에서 당대 최고의 재즈밴드였던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공연을 했습니다.
여기서 테너 색소폰의 일인자 Lester Young을 만납니다.
레스터의 음악을 흠모했던 빌리는 그를 가리켜 ‘프레즈(프레지던트 레스터)’라고 불렀고,
레스터는 빌리의 음악성과 기품있는 자세에 반한 나머지 그녀의 별명인 레이디에 할리데이를 합쳐
‘레이디 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뒤 레스터 영과 빌리 할러데이는 죽는 날까지 교류하면서 서로를 위로했고 따뜻한 정을 나누었습니다.
스타가 된 뒤에도 인종차별을 겪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백인 사교클럽에서 노래할 때는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주방문을 통해서만 홀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디트로이트 극장은 빌리가 흑인 밴드와 공연할 때는 얼굴이 너무 희다며 검댕칠을 했고,
백인 밴드와 공연할 때는 얼굴이 너무 검다며 강제로 핑크 물감을 칠하기도 했습니다.
공연할 때는 탁월한 노래 실력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공연이 끝나 거리로 나오면 그녀는
재즈싱어가 아니라 백인으로부터격리되어야 하는 한 마리 ‘검둥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빌리는 루이스 앨런으로부터 또 하나의 시를 선사받습니다.
역시 빌리의 대표작이 된 God bless the child (신은 어린이를 축복한다)
이 또한 흑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유린에 저항하는 노래입니다.
이 두 곡과 함께 죽기 직전에 발표한 그 어떤 가수도 흉내낼 수 없는 빌리만의 독특한 냄새가 베어 있습니다.
그 노래들은 빌리의 상징이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면 청중들에 의해 제지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죽은 뒤에야 찾아온 평화 >
빌리는 많은 남자와 연애를 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죠.
가수로서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흑인으로서의 좌절감, 평탄치않은 결혼생활은 그녀를 마약중독으로 끌고 갔습니다.
몇 차례 감옥과 요양원을 드나들었습니다.
1947년 봄, 빌리는 마약을 끊기로 결심하고 맨하탄의 요양원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요양원 측에서 밀고하는 바람에 퇴원하자 마자 마약단속반에 걸려 감옥으로 들어갔습니다.
출옥한 뒤 가진 카네기 홀 컴백 공연에서 그녀는 열광적인 호응을 받아 재기에 성공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뉴욕시는 마약전과자라는 이유로 나이트클럽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전국을 떠돌며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대성황이었고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 했습니다.
공연 수입은 남편이 중간에서 가로채는 바람에 그녀는 언제나 빈털터리였습니다.
그 뒤로도 빌리는 결혼과 이혼,마약과 감방행의 연속이었습니다.
1957년에는 마약과 무기소지 혐의로 필라델피아에서 체포돼 다섯 번째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으나 몸과 마음이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지
무리한 공연과 레코딩을 강행했습니다.
1959년 봄 빌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병원에 입원했으며 그리고 병원 침대 위에서 또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검둥이의 인권을 경찰은 마구 짓밟았죠.
병원의 의사나 간호원들도 마약으로 몸을 망친 흑인 여자에게 조금도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발작을 일으키면 마지못해 진정제를 주사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1959년 7월 17일. 밑바닥 인생의 한과 평등을 갈망하는 검은 영혼들의 메시지를 전하던 위대한 가수는
차가운 독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빌리 인생의 동반자였던 테너 색소폰 주자 레스터 영이 죽은 지 10주 지난 뒤였습니다.
마흔네살인데도 80대 노인처럼 쇠잔해 보이는 주검 위에는 다음과 같은 진료 기록판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병명 :마약 중독 말기 증상, 치료 방법 : 없음’
Billy Holiday는 죽기 직전 한 장의 보석같은 음반을 남겼습니다.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낸 Lady In Satin입니다.
이 음반에서는 지난 시절의 황금의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고,
세상살이의 설움과 마약에 찌든 쇳소리가 듣는이의 귓전을 할퀴는것만 같습니다.
음역의 한계를 거침없이 넘나들던 싱싱한 목소리, 레스터 영의 테너색소폰에 맞춰 “그대가 미소지으면
온세상이 그대와 함께 미소지어요”하던 초기의 노래들은 물론 좋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는 처연한 음색으로 가득한 이 노래들은 감상자에게 또 다른 의미를 선사합니다.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대변하는 것만 같은 이 음반의 타이틀 트랙은
바로 빌리만이 그 맛을 살려 부를 수 있었던 I’m a fool to want you입니다.
어느날 아무도 모르게, 병든 들개처럼 죽어간 뒤에 비로소 안식을 찾은 불행했던 여자,
빌리 할러데이는 사후 27년째 되던 1986년 ‘헐리우드 명예의 전당
Holly-wood’s Walk of Fame’에 그 이름이 올랐습니다.
Billy Holiday / 무라카미 하루키 `재즈 에세이` 중에서